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디라 간디 (문단 편집) === 비상사태 해제와 1977년 총선 === 그렇게 인디라 간디는 국제적으로도 [[독재자]]라는 욕을 들어먹어가고 혹독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2년 동안 2번이나 비상사태를 연장시켜가면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1977년, 인디라 간디 총리는 마침내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총선을 실시해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결단을 내리는데, 왜 인디라 간디가 굳이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총선을 실시하려 시도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아마 정부 통제 하의 언론만 보다보니 여론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제 인기도를 과대평가했다는 가설이 주류.[* 참고로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딸로서 해방 운동을 가까이서 알게 되었고, 이 영향으로 보다 개인적인 대통령제가 다원적 민주주의가 이질적인 인도를 위해 유일하게 적합한 정부라고 평생 믿어왔다고 한다.] 인디라 간디가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하자 그간 설움에 시달리던 야당들은 그야말로 하나로 뭉쳐 총집결했다. 기존의 인도 국민회의(O)와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가 중심인 바라티야 자나타 상, 사회주의 정당들, 그리고 북부의 농민들을 주 기반으로 하는 [[차란 싱]] 대표 주도의 '바라티야 크란티 달' 당 등이 모두 뭉쳐서 '자나타 당'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독재냐 민주주의냐'를 프레임으로 걸면서 인디라 간디의 비상사태 선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반면 그와중에 인디라 간디의 인도 국민회의(R)은 인디라 간디 총리의 아들 산제이 간디의 거취를 두고 집안싸움이 일어나면서[* 산제이 간디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되자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산제이 간디가 인디라 간디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느냐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나왔다. 일부 인사들은 인디라 간디를 보위한다는 목적으로 산제이 간디를 쫒아내려 들었다.] 자중지란에 빠졌다. 결국 1977년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R)는 '''의석 수가 350석에서 153석으로 수직추락'''했고 인디라 간디 총리 역시 총선 대패의 책임을 지고 1977년 3월 23일에 비상사태를 해제한 후 바로 다음날인 1977년 3월 24일 총리직에서 사임하고야 만다. 인디라 간디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새 총리로 취임한 인물은 옛날에 인디라 간디와의 갈등으로 인도 국민회의에서 탈당하고 자나타 당에 입당한 [[모라르지 데사이]]였다. 한편 인디라 간디는 1978년 11월에 보궐선거에서 지역구를 차지하며 하원으로 재입성했다. 권력욕 하나만큼은 대단했던 인디라 간디가 그대로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모라르지 데사이 내각 아래에서 내무부장관을 맡고 있던 [[차란 싱]]은 인디라 간디를 꼭 감옥에 처넣고 싶어했다. 하도 인디라 간디에게 시달렸던 탓에 인디라 간디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탓이 컸다. 그러나 인디라 간디의 열성 지지자들이 워낙 전국적으로 많이 깔려있었기에 인디라 간디를 심판하는 일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인디라 간디의 극성지지자들이 인도 항공 410편을 납치해 인디라 간디 총리의 석방을 주장하기까지하면서 국면은 더욱 경색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인디라 간디를 증오한다는 걸 빼면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는 인도판 [[반동탁 연합]]이나 마찬가지였던 자나타 당은 인디라 간디의 처우를 두고 격렬한 집안싸움에 접어들었다. 차란 싱은 독자 행보를 계속하며 자나타 당 내부에서도 데사이 총리를 반대하는 자나타 당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결국 차란 싱은 데사이 총리를 압박해 강제로 사퇴하도록 만들었고, 1979년 7월 28일에 [[차란 싱]]이 인도의 제5대 총리로 취임한다. 차란 싱은 총리로 취임할 적에 인디라 간디와 산제이 간디에게 제기된 모든 기소들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인도 국민회의]]의 지지를 얻어내며 연정을 구성할만한 의석수를 겨우 채웠다. 하지만 차란 싱 총리가 정작 취임한 이후에는 인디라 간디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지 않자 당연히 인도 국민회의의 지지도 철회당했다. 1979년 8월에는 레디 대통령이 직접 의회를 해산했고 총리직을 유지할만한 의석수를 챙기지 못한 차란 싱 총리는 취임한 지 1년도 안된 1980년 1월 14일에 그대로 사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